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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났다. 하늘에 걸린 새하얀 고리도, 백색의 대지에 뿌리내린 공상의 가지도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랜드 오더가 종료되었습니다. 범인류사는 안전합니다. 인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모인 영령은 목표가 달성되자 하나둘씩 퇴거했다. 생존한 스태프는 먼저 떠난 동료의 넋을 기린 뒤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신왕의 옥좌가 소멸한 후에도 이런 분위기였었더랬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지.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매끄러운 벽을 느리게 훑는다. 어수선한 복도를 걸어가자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림자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그러고 보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저는…. 고민 중이에요. 다른 분들은요?”“나는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려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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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났다. 하늘에 걸린 새하얀 고리도, 백색의 대지에 뿌리내린 공상의 가지도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랜드 오더가 종료되었습니다. 범인류사는 안전합니다. 인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모인 영령은 목표가 달성되자 하나둘씩 퇴거했다. 생존한 스태프는 먼저 떠난 동료의 넋을 기린 뒤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신왕의 옥좌가 소멸한 후에도 이런 분위기였었더랬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지.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매끄러운 벽을 느리게 훑는다. 어수선한 복도를 걸어가자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림자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그러고 보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
“저는…. 고민 중이에요. 다른 분들은요?”
“나는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려고. 기억에 남아있던 것들이 잘 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쉬고 싶기도 해서.”
“무리도 아니지. 그동안 우리가 본 건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으니까. 나는 칼데아에 남을까 해.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 떠나기에는 꽤나 아쉬워졌어. 애착이 생겼거든.”
“그렇군요. 해리엇 씨도 남는다고 들었어요.”
“너도 남아준다면 든든할 텐데. 그때처럼 인원이 물갈이가 되어도 네가 한 일 정도면…. …아, 그랬다가 칼데아 습격이 일어났었지.”
“그거 금지 화제야, 금지 화제!”
“하하.”
간단한 담소를 마무리하고 다시금 걸어간다. 웃음기를 머금었던 입꼬리가 내려간다.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나는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언제부터 한계에 다다랐는지는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서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 건지, 이곳이 어둠 속인지 빛 속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걸어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는, 그 남자는 내가 내일을 향해 나아가길 원했다. 비단 그 사람 혼자만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등불이 내는 빛에 의지한 채 하염없이 걸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자 그는 온데간데 없고 앞을 밝혀주던 등불은 산산조각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은 희망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선 안 됐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내가 죽인 목숨들과 나 스스로를 마주 볼 수 없다. 그러니까…….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대체 뭘 위해 이러고 살아야 하는데? 세상 따위 내 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인간 같은 건 싹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증오스러워, 가증스러워, 역겨워…! 그날 도망치고 다시 되돌아오지 말걸 그랬어! 아니, 제시간에 맞춰 관제실에 가기만 했어도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이제 됐어. 전부 그만두자. 결심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죽기로. 당연하게도 이 다짐을 털어놓은 상대는 없다. 나는 죽을 생각이 없는 멀쩡한 사람인 양 굴면서 종착점 하나만을 바라보고 걸었다. 그 남자가 곁에 없으니 마음을 굳히는 건 더욱 쉬웠다. 또 다른 쪽이 있었지만 나는 그와의 접촉을 거부했다. 그 얼굴을 보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워져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대화하지 않을 것이다.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너는 나를 떠난 배신자니까.
대부분의 영령이 칼데아를 떠났다. 정리는 막바지에 접어들어 이곳저곳에 정리 박스가 놓였다. 어디로 갈 예정인지 묻는 마슈의 질문에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나는 마이룸을 향해 걸어간다. 기다란 복도가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진다. 오른쪽 손등에 떠오른 붉은 문양에서 그와의 연결이 느껴진다. 처음 계약했을 때부터 느꼈던 불안정한 회선이 여즉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어 퇴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은 언제 퇴거하는지 물어볼까 고민도 했다. 네가 내 계획을 망쳐놓으면 곤란하거든. 하지만 여전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말을 걸지 못했다. …아니, 거짓말이다. 나는 그가 아는 것이 두렵다. 내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낱낱이 까발리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암굴왕이든 새로 만난 암굴왕이든 상관없이 그가 에드몽 당테스인 이상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알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걷는 동안 운 좋게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익숙한 개폐음과 함께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생활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협탁 앞에 멈춰 서서 미동도 없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적막과 어둠이 방을 가득 채운다. 마치 그때와 같아. 나 혼자 어둠 속을 걸어가야 했던 그때와. 어쩌면 지금도 그곳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아무 상념도 떠오르지 않을 무렵이 되어서야 맨 윗 서랍을 열었다. 늘 가지고 다녔던 권총 하나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한 검은색의 단면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을 반사한다. 익숙한 동작으로 총을 들어 탄창을 확인하고 슬라이드를 뒤로 당긴다. 격철이 젖혀지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총구를 관자놀이에 댄다.
아아, 드디어, 이걸로 끝…….
커다란 폭음과 함께 바닥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손목을 그러쥔 것은 익숙한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