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리얼/글 데이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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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났다. 하늘에 걸린 새하얀 고리도, 백색의 대지에 뿌리내린 공상의 가지도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랜드 오더가 종료되었습니다. 범인류사는 안전합니다. 인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모인 영령은 목표가 달성되자 하나둘씩 퇴거했다. 생존한 스태프는 먼저 떠난 동료의 넋을 기린 뒤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신왕의 옥좌가 소멸한 후에도 이런 분위기였었더랬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지.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매끄러운 벽을 느리게 훑는다. 어수선한 복도를 걸어가자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림자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그러고 보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저는…. 고민 중이에요. 다른 분들은요?”“나는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려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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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째깍. 시계 초침만이 울리는 적막한 방 안에서 불편한 침묵이 흘러앉았다. 언제나 옆에 있을 터인 복수귀는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의 부름에 의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다. 그리고 이곳에 그를 기다리는 자가 둘. 유일무이한 마스터와 그의 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 알렉상드르 뒤마다.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려들지 않는 그림자의 미간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그가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어도 저 남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명백히 뒤마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뒤마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새하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마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그렇게까지 불편해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내가 마스터, 당신을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말이야. 하핫,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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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물을게. 너, 나를 두고 갈 생각이지?""……그래. 네 말이 맞다."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기공의 주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딛자 두 사람은 지면을 잃고 허공으로 낙하한다. 떨어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그림자, 물러나라!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내 불꽃은 너를 불사를 수도….""그딴 건 알 바 아냐!""……윽!""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이야. 나는 네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는데…. 지금까지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널 두고 나아가라고…? 나아가…? 여기서 더……?" 푸른 불꽃이 긴 머리카락을 땔감으로 삼아 불타오른다. 그녀는 자신을 태우려는 불꽃에도 아랑곳 않은 채 복수자에게 원망의 말을 내뱉는다. 기나긴 시간을 숨겨온 본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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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의식만이 흘러들어온다. 온몸이 침체된 진흙에 붙들린 것 같다. 이미 겪어본 적 있는 일이다. 그가 말하길, 이곳은 그녀만의 폐기공. 은원. 꿈의 밑바닥에 있는 진흙. 잔혹한 현실도 버텨내던 그녀였지만 유독 꿈에는 약했다. 무의식이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헤매고 헤매다 겁을 집어먹고 일어나는 것이 정형화된 패턴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세계는 밑바닥으로 내려올수록 주인의 맥을 못 추게 했다. 하지만 이곳의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마치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는 틀림없이── "또 이곳에 내려왔군. 그토록 오지 말라고 말했을 터인데."그가 있으니까. "암굴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