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Sauveur
작성일
2024. 10. 19. 05:24
작성자
인류 최후의 마스터

눈을 뜨자 어두컴컴한 의식만이 흘러들어온다. 온몸이 침체된 진흙에 붙들린 것 같다. 이미 겪어본 적 있는 일이다. 그가 말하길, 이곳은 그녀만의 폐기공. 은원. 꿈의 밑바닥에 있는 진흙. 잔혹한 현실도 버텨내던 그녀였지만 유독 꿈에는 약했다. 무의식이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헤매고 헤매다 겁을 집어먹고 일어나는 것이 정형화된 패턴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 세계는 밑바닥으로 내려올수록 주인의 맥을 못 추게 했다. 하지만 이곳의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거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마치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눈을 떴을 때, 그 앞에는 틀림없이──

 

" 이곳에 내려왔군그토록 오지 말라고 말했을 터인데."

그가 있으니까.

 

"암굴왕."

"그래. 칼데아의 ''와는 잘 지내고 있나? , 물어보지 않아도 그 표정을 보니 알겠지만."

 

그림자는 암굴왕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옥탑에서 짓던 표정과는 조금 달라진 얼굴. 이른바 사랑하는 자에게만 지어주는 미소였다. 자신은 칼데아의 암굴왕과 다른 존재라 설명한 적 있으나 그러든 말든 그녀는 그를 똑같이 대했다. 그렇겠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을 터였다. 어찌 됐든 그림자는 암굴왕에게 유독 약했다. 그의 흔적을 찾아내 손바닥에 올려놓곤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곤 하여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방이 집어삼킬 듯 울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던 여자다.

칠흑 뿐인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더듬거린다. 그러자 곧 굳건하면서도 부드러운 동작으로 제 손을 낚아채는 팔과 맞닿을 수 있었다. 그의 동작은 거친 듯 보여도 상냥함과 배려심이 담겨있었다. 그림자는 그런 몸짓을 사랑했다. 마치 그의 말투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상냥함은 겉모습에 가려지기 십상이었으나, 자신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일어나면 네가 있겠지만. 이곳의 너도 만나고 싶었어. 혼자서 외롭진 않아?"

"이것은 내가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일.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것보다 네 안전을 걱정하는 것이 좋을텐데. 보아라! 저것들은 또 너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 여기가 네 은원인 탓이지."

"하지만 내 은원을 네가 지킬 필요는 없는데도."

"쉽게 보지마라. 저것들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게 아니다. 수 많은 영령들과 계약하여 인리를 지켜온 자에게 얹힌 원념이 단순할 리 없다. …여긴 내가 처리한다. 너는 깨어나도록."

 

그림자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정하다.

부탁하지 않은 정리를 도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일어나면 '그'는 언제나처럼 아침의 상냥함을 건네주겠지. 얼마나 이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를 복수귀라 칭하며 모든 것을 불사지르지만, 단 한 사람의 평안만큼은 지켜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거 알아, 암굴왕? 나는 네가 없었다면 지금쯤…….

 

"녀석들이 오고 있군. . 어떡할 테냐, 그림자."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가자."

 

호탕하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망토와 함께 휘날린다. 그 전에 담배를 펴도 된다고 했어야 할까. 아쉽게 남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는 샛노란 눈동자를 시야에  담았다.

 

"좋다. 함께 방황하는 것들을 제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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