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스터는, 인류 최후의 마스터는 망가지고 말았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망가진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불에 타 산발이 된 머리칼과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미친듯이 복도를 배회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감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는 관제실의 두 인물만이 그녀를 따로 불러냈을 뿐이다. 그림자는 둘 앞에서 '네', '아니오'라는 단편적인 대답만을 중얼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문제가 그걸로 끝이었다면 좋으련만, 칼데아에 등록된 모든 어벤저의 링크가 끊겨버리는 초유의 사태마저 일어났다. 사실 마스터의 상태에 영향을 준 것은 그것이 원인이었을 터다. 그녀가 암굴왕을 끔찍이 아끼는 것을 그 누가 모를까. 하지만 직후 등록된 암굴왕의 새로운 영기는 소환되자마자 마스터에게 뺨을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것도 꽉 쥔 주먹으로. 상상을 벗어나는 사건의 연속에 서번트들은 숨을 죽이고 마스터의 상태를 살폈다. 그림자는 매일마다 행하던 순찰조차 돌지 않고 나흘을 내리 마이룸에 처박혔다. 닷새째부터는 얼굴을 조금 비추나 싶더니 죽을 둥 살 둥 한 얼굴로 이전의 스케쥴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그녀에게 위태로운 구석이 없었냐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가 보아도 서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는 꼭두각시가 실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며 자원을 모으고 분배했다. 그런 마스터의 상태를 걱정한 몇몇 서번트가 말을 걸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특정 특이점에 대해 일관적으로 언급을 피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동일하게 암굴왕 몽테크리스토라는 존재를 무시했다.
이쯤 되니 모두가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매일 같이 붙어있던 둘이었건만 기존의 영기는 텅 비어버렸지, 새로운 영기는 도통 상대를 하지 않는다. 전력으로써 기용하기는 하나 말 한 마디 섞으려 하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암굴왕은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감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룰러 서번트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스터를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고. 그것은 암굴왕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이전의 암굴왕과는 다른 새로운 개체였으나 그림자를 향한 울렁거릴 정도의 깊은 마음에는 차이가 없었다.
암굴왕은 복도를 걸었다. 익숙한 듯도 아닌 듯도 한 문앞에 서 팔을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영체화를 이용해 가볍게 안으로 들어서면 침대에 걸터앉은 마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림자는 두 손으로 칼데아 로고가 새겨진 타블렛을 꼭 쥐고 있었다. 늘상 하던 편성이나 재료의 관리를 하는 모양이었으나, 검은 두 눈은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텅 비어있었다. 암굴왕은 그 모습에 절로 숨을 들이켰다. 다행스럽게도 곧 생기가 없는 듯 가라앉아있던 얼굴에 반응이 돌아왔다. 눈앞의 상대를 발견하자 새카만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경계하는 몸짓을 취했다. 그가 이렇게 먼저 가까이 다가온 것은 소환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마스터. 이야기를 하지."
"나는 너랑 할 얘기 없어."
"나에게는 있다."
"나는 없어."
"이쪽은 있다."
"이쪽은 없다니까."
초등학생의 대화인가 싶을 정도의 유치한 대화가 흘러가자 암굴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소환된 후로 가장 많이 나눈 대화량이라고 한다면 믿겠는가? 그는 어디에 앉는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가 경계를 풀 수 있도록 했다.
"네가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다른 내가 한 행동 때문이겠지."
"……."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그러는 것은 그만둬라."
"…무엇을?"
"자신을 몰아붙이면서까지 하려는 것을."
그림자는 암굴왕을 빤히 바라봤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방에서 반사광이 들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눈동자에 스친 것은 혼란, 분노, 슬픔 등이 혼재한 탁류라는 것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무슨 뜻이지?"
"내가 나아가길 원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잖아? 그런데, 몰아붙이지 말라고?"
그림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옷깃이 잡혀 허리를 굽히면 코끝에서 곧바로 낮은 숨결이 느껴졌다.
"네가 그런 말을 해? 네가?"
"그림자. 나는──"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 몰라…. 너는 날 떠났잖아? 나는 네 곁에 있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떠났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뭐? 하…! 지금 뭐하자는 거야?!"
그때와 똑같다. 그의 멱살을 잡고 분노를 토해낸다.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시선을 돌린다. 속이 갑갑하다. 거대한 납이 심장을 짓눌러 터질 것 같다. 결국 그와는 이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다. 이보다 더한 최악은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이별이었다. 그런 결말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도. 옷깃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린다. 이렇게 계속 서로에게 상처만 줄 거라면 차라리…. 멱살을 잡은 손을 떼려는 그 순간.
"그래도 나는…."
"네가 괴롭지 않았으면 한다."
"네가 이 이상 나아갈 수 없어도, 한 걸음도 발을 뗄 수 없어도, 이 불꽃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다."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림자는 자신이 무엇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 말이 그 남자에게서 나왔으리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방에는 그와 자신 단둘이 있을 텐데도.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제정신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없지 않나? 당연하잖아. 내가 아는 암굴왕은, 에드몽 당테스는──내가 만드는 빛을 보고 싶어했으니까. 그림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상체를 밀치고 뒤로 물러났다.
"거….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이 아니다. 진심이야."
"거짓말이야! 네가 누구보다 희망을 보고 싶어하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내가 잘 알아.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걸어왔던 건데. 죽, 죽지도 못하고 계속…!"
뒷말은 입맞춤에 삼켜졌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안을 헤집었다. 모든 것이 증발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방안을 채우는 공기도, 미지근한 기온도, 사물의 감촉도 그 무엇 하나 상관없었다. 그저 그 사이의 공백을 가득 채우듯 뜨거운 것을 계속 흘려보내고 가득 삼켰다. 정신을 차리면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날이 밝아온다.